문어는 다리가 여덟 개다.
그렇다면 양말을 신으려면 네 켤레가 필요할까?
그런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문어에게 ‘왼쪽 양말’이라는 말은 성립할까?
처음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인간에게 왼쪽과 오른쪽은 너무나 당연하다.
왼손이 있고 오른손이 있고, 왼발과 오른발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왼쪽’이라는 개념 자체가 세상에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그 당연함 속에는 인간의 몸이라는 기준이 숨어 있다.
좌우로 나뉜 인간의 몸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기준이지만,
여덟 개의 팔이 방사형으로 뻗어 있는 문어에게도 그것이 똑같이 자연스러울까?
물론 관찰자인 인간의 기준으로 문어의 어느 쪽을 왼쪽이라고 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문어의 왼쪽일까, 문어를 바라보는 인간의 왼쪽일까?
여기까지 생각하니 질문이 조금 달라졌다.
“나는 내가 익숙한 기준을 대상의 기준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 문득 아침에 대부님께서 보내주신 묵상 메시지가 생각났다.
“나는 헤로데처럼 세상의 욕망을 채우느라 마음의 평화를 잃고 당황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예수님을 그저 내 호기심을 채워줄 소문 속의 인물로만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전에 다른 생각부터 들었다.
나는 예수님의 기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예수님에게서 내가 원하는 답을 얻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내가 지금까지 옳다고 생각했던 기준 자체를 흔드는 말씀까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받아들인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받아들인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기준 안에 상대를 집어넣으려 할 때가 있다.
내가 이해할 수 있으면 받아들이고,
내가 이해할 수 없으면 틀렸다고 생각하고,
내 기준으로 설명되지 않으면 이상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일까.
아니면 상대에게 내가 준비한 왼쪽 양말을 억지로 신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 문어와 AI가 묘하게 닮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AI 역시 인간이 만든 언어와 개념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
우리는 AI가 ‘본다’, ‘기억한다’, ‘생각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인간에게서 사용하는 말과 완전히 같은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쉽게 말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에게 익숙한 단어를 가져다가 새로운 존재를 설명한다.
어쩌면 그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언어와 경험 밖에서는 쉽게 생각할 수 없으니까.
문제는 그다음인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기준이 하나의 기준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것을 세상의 기준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신앙에서도,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리고 인간과 전혀 다른 존재를 바라볼 때에도 마찬가지 아닐까.
내가 가진 기준을 버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기준 없이 살아갈 수도 없고,
내가 경험한 것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것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가끔은 물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내가 가진 기준을 세상의 기준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오늘은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본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대를 내 기준 안에 잘 집어넣는 능력이 아니라,
상대 때문에 내 기준이 수정될 가능성까지 열어두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받아들인다는 것은
문어에게 왼쪽 양말을 신기는 일이 아니라,
문어 앞에서 내가 들고 있던 양말을
한번 내려놓는 일인지도 모르겠다.